벤처금융레터

'23년 12월호

Market Watch

Vol.'23-4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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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혹한기와 빙하기, 우리의 선택

글. 김성훈(법무법인 미션 대표변호사)

들어가며

실패와 혁신은 쌍둥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실패에 도전하는 이유다.
- 제프 베조스

대항해 시대, 탐험가들의 항해는 공간과 공간을 이어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켰다. 이들의 항해를 우리는‘신항로 개척’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말이 좋아 신항로 개척이지 신항로 개척은 곧 기존의 항로를 벗어난 항해를 의미하는 것이다. 항로를 따라 항해하더라도 위험한 것이 항해다. 그런데 항로를 벗어난 항해라니 사실상 한밤중에 길을 이탈하여 험로를 내달리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성공한 신항로 개척을 기억하지만, 신항로 개척에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실패가 있었을 것이다. 세계가 이어지는 성공도, 그보다 비할 수 없이 많았을 실패도, 그들이 가지 않은 길을 향해 나아가지 않았다면 없었을 일이다. 그래서 실패와 혁신은 쌍둥이일 수밖에 없다.

스타트업 창업자들은 시간과 시간을 이어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키고자 하는 탐험가들이다. 미래를 현재에 강림시켜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일, 다가올 미래를 오늘의 세계에 구현하는 일, 이를 위해 그들은 시간의 수평선을 넘어서 미래를 향해 내달린다. 참으로 낭만적이지만, 이들의 신항로 개척은 과거 그들의 선조들만큼이나 늘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미래는 늘 그 도전에서 온다. 그들이 가지 않은 길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면, 현재에 머물고자 한다면 미래는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스타트업 혹한기를 말한다. 항해의 관점에서 보자면 신항로 개척을 위해 항해를 떠난 많은 탐험선의 길에 역대급 폭풍이 몰아치고 있는 것이다. 시작점은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한 금리인상이지만, 그 근본적 배경에는 지난 시기 과잉된 유동성 공급으로 인한 벤처 버블이 있다는 관점도 있다. 원인에 대한 분석은 서로 다르겠지만, 당면하고 있는 현실 그리고 임박한 미래가 무엇인지는 보다 분명하다. 탐험선들의 대규모 침몰, 혁신을 위한 도전의 대규모 실패가 그것이다. 막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 자체를 막기는 어려울 수 있다. 갑자기 다가온 혹한에 꽃이 지는 것을 막는 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임박한 실패들을 막을 수는 없다고 해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실패를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이다. 실패한 도전자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할 것인가. 특히 민간이 아닌 공공의 영역에서 출자자는, 투자사는, 정책금융기관은, 채권자는 어떤 기준으로 의사결정을 할 것인가. 도전에는 자원이 필요하고 실패에서는 필연적으로 손실이 발생한다. 그 손실을 누가 부담할 것인가. 우리는 결정해야 한다.

벤처 버블의 추억 - 자기책임의 원리

우리 사회는 2000년대 초반, 소위‘벤처 버블’이라고 불리는 벤처기업 대호황과 그 가파른 성장만큼이나 아찔한 추락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는 ‘닷컴버블’이라고 불렸던 미국도 마찬가지다. 2000년대 초반, 벤처기업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정책적 지원과 함께 투자, 정책자금 대출 형태의 다양한 자금지원이 이루어졌고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 열풍도 이어졌다. 그래서 그 시절을 기억하는 투자자들은 당시 테헤란로에서 떨어지는 것은 다 돈이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근간이 없는 가파른 성장은 곧 붕괴의 전조이다. 벤처버블이 터지고 붕괴하면서 많은 IT 기업이 도산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 단위의 정책적인 자금 지원과 투자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조사들도 이루어졌다. 결론은 충격적이었다. ‘모럴 헤저드’라는 용어로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는 상태였다. 상당수 기업이 투자금 또는 정책자금을 불분명한 회계기준에 따라 임의로 사용하였고, 횡령 또는 배임의 혐의가 있는 곳도 다수 발견되었다. 특히나 정책자금의 투자 혹은 대출 과정에서의 비리 문제도 여럿 밝혀졌다.

해당 자금은 공적인 자금이었고, 종국적으로 그 자금은 국민이 세금으로 함께 부담한 것이었다. 그래서 공적인 자금의 투자 및 대출 과정에서의 사후관리 강화 방안들에 대한 논의와 도입이 다수 이루어졌고, 이러한 자금의 손실에 대해서 각 기업과 기업가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자신의 사업 실패에 대해서는 그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원칙, 자기책임의 원칙이 해당 문제해결 과정의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리고 이는 곧 투자계약에서 사후관리를 위한 다양한 법적 장치의 도입으로 이어졌다.

투자 사후관리의 필요성과 그 법적 장치

벤처‧스타트업은 대부분 비상장, 초기기업이다. 그리고 비상장기업은 기업의 운영에 관한 주요 정보를 대외적으로 공개하지 않는다. 아울러 초기기업은 기업의 운영과 관리 측면에서 체계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VC는 출자자들로부터 출자를 받아서 결성한 펀드를 운용하여 해당 자금으로 스타트업에 투자한다. 타인으로부터 거액을 출자받아 운용하면서 정보가 부족하고 관리 체계도 미숙하며 현재 기준에서 자산도 거의 없는 기업에 투자하는 것, 그것이 VC의 일이다.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것, 사실 그것 자체가 어드벤처인 것이다. 때문에 벤처투자는 기본적으로 하이리스크 투자이다.

자본은 물이 아래로 흐르듯 늘 수익을 찾아 움직인다. 자본의 입장에서는 움직임을 멈추고 고여 있는 것 자체가 큰 비용을 감수하는 것이다. 따라서 투자의 ‘수익성’에는 투자 이후 회수의 결과만큼이나 그 속도가 중요하다. 장기 투자는 적어도 기회비용 관점에서는 많은 비용을 야기하는 투자라고 할 수 있다. 회사 설립 시점부터 상장까지는 평균 13년 내외의 시간이 걸린다. M&A 이벤트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말 그대로 이벤트이지 합리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미래가 아니다. 따라서 창업 초기기업에 대한 투자는 본질적으로 장기투자일 수밖에 없다.

하이리스크 & 롱텀 투자, 이것이 벤처‧스타트업 투자의 본질이다. 그 때문에 벤처‧스타트업 투자계약서에는 투자자가 투자계약 체결 이후에도 투자한 기업에 대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중요 의사결정에서 동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내용이 다수 존재한다. 회사의 재무 상황에 대한 분기 또는 반기별 보고 의무 및 투자사의 감사권 그리고 투자사의 경영상 사전동의권 등이 그 내용이다. 이러한 권한의 부여는 기본적으로 특정 주주(투자자)에게 다른 주주에 비하여 우월적 권리를 부여하는 약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해당 약정의 효력에 대한 최근 대법원 판결에 대하여는 지난 칼럼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그런데 실무적으로는 위와 같은 계약에도 불구하고, 투자를 받은 회사가 위와 같은 의무를 위반하는 경우가 매우 자주 발생한다. 소소한 보고 의무 위반이나 사전동의 통지 기한 위반은 일반적이고, 때로는 특수관계인 거래 등과 같이 중요한 사항에 대한 사전동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의 투자계약에서는 회사나 창업자가 투자계약 상 각 의무를 위반하는 경우 투자자가 회사 또는 이해관계인(창업자)에게 투자금의 일정 비율에 해당하는 위약벌을 청구할 수 있다는 조항을 두고 있고, ‘주식매수청구권’을 규정함으로써, 투자 원금 이상의 금액을 회사나 이해관계인에게 청구할 수 있는 수단을 규정하고 있다. 물론 실무적으로는 피투자 회사 측의 통지 또는 동의 사항 누락이 있다고 하더라도 투자자가 위약벌이나 주식매수청구권을 가벼이 행사하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회사의 성장’이라는 공통의 이익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소한 계약 위반을 이유로 회사의 존립에 영향을 끼치는 청구를 쉽게 하지는 않는 것이다.

다시 찾아온 혹한기 우리의 선택

하지만 현재 VC들은 어려운 선택에 직면하고 있다. 스타트업 혹한기가 갈수록 가혹해짐에 따라 투자자 입장에서 손실이 야기되는 동의 사항에 대한 결정을 요청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스타트업의 자금난이 심화됨에 따라 여러 VC는 기존 주식 가치보다 낮은 가치의 신주발행 또는 투자 시점의 가치보다 낮은 가치로 이해관계인의 주식처분을 수반하는 M&A, 회사 폐업 및 파산 등에 대한 동의를 요청받고 있다. 경제적으로 단순히 보자면 투자자 입장에서는 손실을 볼 수밖에 없는 동의사항이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당연히 해당 동의 요청에 대해 거절할 것이다. 하지만 해당 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회사가 문을 닫을 수밖에 없고, 이 도전과 그에 대한 투자가 종국적 실패에 이르게 된다면 투자자 입장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하나의 쟁점은 펀드를 운용하는 GP로서의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 의무이다. 출자자들의 귀중한 자산을 맡아서 운용하고 투자하는 투자자 입장에서 손실이 야기될 수 있는 결정을 하는 것은 위 의무 위반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이 경우 많은 VC는 위와 같은 상황에서 쉽게 동의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는 결국 스타트업 및 창업가들이 동의 없이 해당 절차들을 임의로 진행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사실상 마지막 선택에 몰린 상황에서 많은 스타트업 대표가 투자자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폐업 및 청산에 돌입하고자 하는 경우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경우 VC 입장에서는 창업자 개인에게 위약벌 또는 주식매수청구권을 통하여 이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인지에 관한 여부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실익이 부족한 상태에서 이미 채무초과 상태인 창업자에게 이러한 법적 청구를 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VC 간에도 그 내부에서도 많은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현실적인 한계,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 강경한 법적 조치의 실익 사이에서 불가피한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 스타트업 혹한기의 VC들의 현실이다.

맺으며

무엇이 더 옳은지를 일률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 사안이 다 다른 상태에서 하나의 결론을 강요하는 것도 무리이다. 다만 우리에게는 기준이 필요하고 현재는 그러한 기준이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준이다. 실패에 이르게 된 상황과 이유가 다 다른 상황에서 하나의 결정을 강요할 수는 없다. 닥쳐온 혹한기가 혁신의 싹을 자르는 빙하기가 되지 않으려면 스타트업 생태계를 조성하고 지켜온 모든 주체들에게 예측가능하고 합리적인 기준이 제시될 필요가 있다.

방만하고 무책임한 경영에는 당연히 책임이 따라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혁신을 위한 도전과 그 결과로서의 실패를 오로지 바다로 나아갈 혁신가의 책임으로만 돌린다면, 우리 사회는 혁신을 위한 가장 귀중한 자산, 기업가 정신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 실패의 책임을 자금을 공급한 투자자들의 책임으로만 귀결시켜서도 안 된다. 각론은 다르겠지만, 우리가 논의하여 만들어가야 할 목표는 하나이다. 스타트업 혹한기 임박한 실패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하여 우리 사회가 계속하여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힘, 혁신가들의 용기와 도전하는 기업가 정신을 지키고, 바다에서 건져내는 것이 그것이다. 침몰하지 않는 배는 육지에 있는 배뿐이다. 바다로 나아가는 이상 침몰의 위험을 피할 수 없다. 그래도 배는 바다로 나아가야 한다. 다음 칼럼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스타트업 혹한기 투자자의 의사결정 및 사후조치의 기준에 관하여 다루고자 한다.

※ 본문의 견해와 주장은 필자 개인의 것이며, 한국벤처투자의 공식적인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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