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란 이후 50일간의 긴 시간을 거치면 바다거북의 부화가 시작된다. 갓 부화한 새끼거북은 낭만적이게도 달빛과 별빛을 따라 바다로 향한다. 바다거북이 처음 부화한 모래사장으로부터 바다까지의 거리는 사람이라면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을 것 같은 짧은 거리다. 하지만 모든 새끼거북에게 자신이 태어난 해변은 덩게르크(Dunkirk) 해변이고 그 자신은 공포에 질린 영국 병사다. 부화한 새끼거북 중 바다까지 안전하게 도달하는 개체는 태어난 거북 중 50% 이하에 불과하다. 짧은 거리지만 아무런 숨을 곳도 없는 그 해변에서 작고 연약한 새끼거북들은 쉴 새 없이 이루어지는 바다새의 공습과 게 등 포식자의 공격을 받고 생을 시작하자마자 마감한다. 바다에 들어가서도 수난은 계속된다. 바다거북 중 최종적으로 성체가 되어 후손을 남기는 개체는 1%에 불과하다. 이쯤 되면 대책 없이 해변에 산란하는 어미 바다거북이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스스로 99%의 죽음을 피한 뒤에 그 많은 예정된 죽음에도 꾸역꾸역 약속한 것처럼 해변으로 나아가 4시간 넘는 산고로 200개의 새로운 생명의 기회를 만드는 그들의 모습은 답답할 만큼 무모하면서도 바다만큼이나 경이롭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 반복된 그들의 도전과 죽음 그리고 생존의 이야기는 그들이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이자, 그 존재 자체이기도 하다.
잠시 돌아와 오늘날의 잔혹한 해변을 본다. 새끼거북과 같은 스타트업들에게 있어서 ‘고금리’는 태어난 해변에 갑자기 철새 때가 날아든 것과 같은 일이다. 창업자는 미래를 현재로 강림시키고자 도전하는 사람들이고, 미래로 다가가는 길에 소요되는 비용의 정도는 금리가 결정한다. 현재의 금리 상황과 그에 따른 투자위축 상황은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만들어가고 그 미래의 자본으로 현재를 버텨야 하는 스타트업들에게 재앙과 같은 일이다. 이제 죽음은 예측이 아닌 관측의 영역이다. 수많은 스타트업의, 수많은 도전이 파산과 폐업이라는 실패로 귀결되고 있다. 갑자기 혹한이 닥치면 많은 생물이 생명을 잃는 것처럼 현 상황에서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버티는 많은 스타트업이 어려움과 파산에 이르게 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대적 요소에 따라 이루어진 때 이른 대규모의 죽음이 자연적인 복원력을 넘어설 정도로 급격하게 이루어진다면 이는 극단적으로는 멸종 혹은 상당한 기간 동안의 세대 단절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가까운 예로 2000년대 초반 벤처붐이 벤처버블과 벤처버블 붕괴를 거치며 대규모 실패로 귀결된 뒤, 우리 사회에서 다시 스타트업 붐이 불기 시작하기까지는 10년 이상 15년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었다. 지금 진행 중인 혹한의 칼바람도 우리 창업생태계에 다시 그와 같은 빙하기를 야기할 수 있다. 대규모 파산과 창업자들의 개인 파산은 창업가들을 신용불량자로 내몰아 최소 5년 이상 우리 경제 밖으로 밀어낸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니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혹한기와 빙하기 그에 따른 대규모 소멸 및 다시 피어나는 창업의 붐은 계절과 같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기다리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마치 계절처럼 반드시 봄이 다시 올 수 있다면, 그것이 그리 멀지 않다면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대한민국의 상황은 혹한기와 빙하기 이후 해빙기를 기다릴 수 있을 만큼 녹록하지 않다. 이제 저출생 고령화 사회라는 것은 전망이 아니라 인구감소로 이어지는 현실이 되었다. 전 세계 그 어떤 나라보다도 역사상 그 어떤 국가보다도 전쟁이나 전염병 없이 압도적인 속도의 자연적 인구감소가 이제 시작되고 있다. 앞으로의 15년 동안에는 지난 15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급격한 인구감소를 겪은 사회가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발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위기의 전망은 산수의 문제다.
세계적인 흐름도 위기를 증폭시킬 수밖에 없다. 지난 30년은 ‘세계화’라는 흐름을 당연히 여기며 전 세계가 연결되고 공존하며 함께 거래하고 경쟁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게 된 시대였다. 그리고 이에 기반하여 대한민국은 세계 그 어떤 나라보다도 빠르게 성장했다. 냉전 시절에는 미국 중심의 자유무역 질서에 참여하여 눈부신 성장을 거두었고, 냉전 붕괴 이후에는 새롭게 부상하는 중국의 세계시장 참여와 글로벌 공급망에서의 협업을 통하여 제2의 도약을 이루었다. 적어도 한국 밖에서는 대한민국이야말로 세계화의 가장 큰 수혜자 국가라는 점에 대해서 큰 이견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여러 장면을 통하여 우리 세대가 경험한 탈냉전 이후 ‘세계화’가 신냉전과 새로운 극적 분열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이러한 분열과 갈라지는 세계는 우리의 경제와 산업의 중추신경을 할퀴며 연결된 세계를 기반으로 성장하고 존속해 온 우리 경제에 회복 불가능한 치명상을 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래서 우리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우리 대한민국에는 더 이상 시간이 없다. 임박한 절벽 앞에 인재와 기술 자본의 융합을 최대한으로 이루어내어야만 절벽을 뛰어넘을 수 있다. 지금까지도 빨리 달려왔지만, 이제는 멀리뛰기의 도움닫기 수준으로 달려야 한다. 우리가 가진 자원의 최대한의 ‘융합’, 이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기술과 자본 인재를 최대한 융합하여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는 일, 우리는 그것을 기업가의 일이라고 부른다. 그렇다. 절벽을 앞둔 우리에게는 기업가와 국가적 차원의 ‘기업가 정신’이 필요하다. 하지만 계절이 겨울이고 혹한기의 시작을 지나는 중이다. 역사상 최대로 BOOM-UP 하던 기업가들과 기업가 정신이 혹한의 칼바람에 쓰러지는 중이다. 봄을 기다릴 수 있다면 자연의 섭리에 맡길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
우리 창업생태계에는 현재의 재난을 극복하고 혁신의 씨앗들을 지켜 미래를 도모할 수 있도록 하는 방주가 필요하다. 그런데 혁신의 씨앗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기업가 정신’이다. 기술도 자본도 기업도 혁신에 필요한 자원이거나 그 결과물일 뿐이다. 기술과 자본 그리고 인재들을 결합하여 불확실한 미래로 나아가는 ‘기업가 정신’이 없다면 혁신은 시작되지 않는다. ‘기업가 정신’이란 마치 물질세계 속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기업가 정신’의 모체는 혁신에 도전하는 창업가 개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기술도 다시 만들 수 있고 자본도 새로이 조달할 수 있으며 기업도 새로 설립할 수 있지만 ‘기업가 정신’은 인위적으로 새롭게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리고 그 ‘기업가 정신’이야말로 불모지나 다름없던 대한민국을 여기까지 성장시킨 가장 큰 힘이자 앞으로의 생존과 성장에 있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에너지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기업 경영에 있어서 물적, 인적 토대가 극히 부족한 상태에서 창업이 이루어지는 스타트업 창업은 일반적인 기업 경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기업가 정신이 태동하고 발현되는 공간이다. 그리고 담대한 도전은 늘 높은 실패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나 혹한이 닥친다면 이러한 실패는 개별 기업과 창업가 단위가 아니라 생태계 전반에 몰아닥친다. 이는 스타트업의 대규모 구조조정과 파산으로 이어지고 종국적으로는 창업자 개인의 책임과 경제체계에서의 격리(신용불량화)로 귀결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전개는 단순한 기업의 실패를 넘어 기업가 정신 자체의 위축을 야기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다시 성장하기 위해서는 혹한기에도 기업가 정신의 모체인 창업가들을 지키고 이들이 생존하고 혹은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길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한 정책적, 제도적인 길은 방주에 빗대어 ARK 프로젝트라 명명할 수 있다.
ARK 프로젝트는 창업기업의 실패가 곧 창업생태계 자체의 실패와 기업가 정신의 위축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하는 정책적 제도적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프로젝트이다. ARK 프로젝트는 창업기업의 실패 상황에서도 그로 인한 사회적, 경제적 비용을 최소화하고, 혁신의 씨앗인 창업가들이 실패를 딛고 도전과 실패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ARK 프로젝트의 실행 과제를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창업기업의 실패 상황에서도 그로 인한 사회적, 경제적 비용을 최소화하려는 방안의 첫 번째로서 투자자의 투자계약에 따른 사후관리 및 정책금융기관의 여신에 관한 정책적 관점의 가이드라인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즉 투자기업이나 창업자가 투자금의 용도 외 사용이나 횡령 배임, 투자계약상 중요 조항의 고의적 위반 등의 행위를 한 사실이 없고, 현시점에서 객관적으로 투자자 손실을 회피하기가 어려운 상황인 경우, 저가의 신주발행이나 이해관계인의 저가 주식처분 나아가 폐업 등 투자자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의사결정에 관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투자자가 재량을 발휘하여 동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정책투자기관이나 VC 등의 의사결정에 있어서 안전망을 만들어 줄 필요가 있다.
또한 투자자의 사후조치에 있어서도 실익이 없고 불필요한 법적 분쟁을 진행하지 않도록 하는 기준의 제시가 필요하다. 특히 공공기관 투자자나 펀드를 운용하는 투자자로서는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를 다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때로는 과도하게 보수적이거나 방어적으로 의사결정을 할 수밖에 없고 여러 사정을 고려하여 재량을 발휘할 경우 그에 대한 책임을 추궁당할 위험에 놓일 수 있으므로 이러한 정책적 방향성을 구체적인 기준으로 정립하여 창업기업의 실패에 따른 사회적, 경제적 비용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는 창업기업의 실패가 창업가들의 재기불능과 경제영역에서의 퇴출로 귀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가령 창업기업이 폐업에 이르기까지 창업자는 최후까지 여러 경로를 통하여 채무를 부담하는 경우가 많고 기업의 채무에 대한 연대보증 등을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통상적으로 창업기업의 실패는 경제적으로 창업가의 실패로 귀결되고 창업가는 개인 차원에서는 상환이 불가능한 규모의 채무로 인하여 파산 등의 절차를 진행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창업자 개인이 파산에 이를 경우 해당 창업자는 통상 5년 가까운 시간 동안 신용불량자가 되어 사실상 우리 경제체계에서 격리된다.
실패에는 책임이 따르지만, 창업의 실패가 곧 창업자의 재기불능과 기업가의 경제계에서의 장기적 퇴출로 귀결된다면 우리 사회는 우리가 투자한 막대한 자금의 상실과 함께 우리가 지키고자 했던 기업가 정신의 상실과 위축이라는 더 큰 손실을 입을 수 있다. 따라서 객관적인 기준과 엄격한 심사를 통해 ‘모럴 헤저드(Moral Hazard)’를 방지하면서도 창업기업의 실패가 곧 기업가 개인의 종국적 실패와 재기불능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창업기업의 정리 및 창업가의 회생을 위한 별도의 제도적인 틀을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는 창업기업의 실패와 창업가의 재도전 과정에서 창업가와 이해관계자들의 이익을 조화롭게 구성할 수 있는 법률적 대안의 마련 및 그 대안 모델의 확산을 위한 노력이 필요할 수 있다. 즉 창업기업의 실패 과정에서 창업기업의 투자자, 채권자 등 이해관계인에게만 그로 인한 손실을 떠안도록 하고 창업가의 책임을 경감하여 그에게 재도전할 기회를 주고자 한다면 이는 불공정한 것으로서 창업생태계의 중요한 축인 창업기업 이해관계인들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기본 윤리에 따르더라도 기업가라면 재도전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자신에게 주어진 신뢰와 본인이 한 약속에 대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창업가의 재기를 위해 창업가의 실패에 따른 책임을 경감해주는 제도적 정책적 방안을 만들더라도 그 경감의 내용과 폭은 그들이 재기하기 위해 필요한 범위 내로 제한되어야 하고, 그들의 재도전에 따른 성과는 실패에 앞서 신뢰를 보여주었고 재기할 수 있도록 두 번째 신뢰와 인내를 보여준 기존 창업기업의 이해관계인들도 공유할 수 있어야만 한다.
실제로 아직은 드물지만 국내외에서는 창업기업의 실패의 경우, 창업기업의 기존 투자자 및 채권자들이 창업자에게 창업자의 기존 채무 혹은 투자계약에 따른 권리 행사를 유예하는 대신 창업자에게 Second Chance를 주면서 창업자의 재창업 기업에 관하여 기존의 투자금 혹은 채권에 상응하는 지분 등 권리를 확보하는 형태의 합의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는 물론 창업기업의 이해관계자들의 창업자에 대한 상당한 신뢰와 인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고, 창업자 입장에서도 재도전 과정과 결과에 대한 일정한 부담을 지우는 부분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창업자의 재도전을 촉진하고 그 과정에서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방안에 있어서 이는 가장 바람직한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ARK 프로젝트에서는 이를 일단 신뢰 기반 재투자 모델(REBOUND, Reinvesment in Enterprises Based on Underlying Deep trust in the founders)로 명명할 예정이다. 다만 이러한 REBOUND 모델이 더 활발하게 활용되기 위해서는 법률적으로 해당 구조가 안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법적, 계약적 구조와 권리와 의무가 정립되고 창업기업의 이해관계인들이 이러한 안정적 모델을 보다 폭 넓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적 지원과 인센티브가 주어져야 할 것이다.
최근 어떤 강의에서 왜 굳이 벤처투자와 스타트업 중심의 로펌을 창립하고, 법무 외 정책이나 제도 개선과 관련하여 이토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아마 이 글이 그 답이 되리라 생각한다.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온 것은 기적이고, 그 기적의 근간에는 ‘기업가 정신’이 있었다. 그리고 기업가 정신이야말로 우리가 생존하고 성장하는 길에 있어서 필수적인 에너지이자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유산이다. 스타트업 창업과 창업생태계는 기업가 정신의 요체이자 모태이다. 곧 다가올 위기 앞에서 우리가 가진 기술과 자본, 인재를 최대한 결합하여 새로운 도약을 만들어 낼 기업가 정신이 우리 역사상 그 어떤 시기보다도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 국가적 위기가 임박한 상태에서 기업가 정신의 모태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 지금이 위기다. 그리고 지금이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