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금융레터

'23년 12월호

Market Watch

Vol.'23-4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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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신뢰 – REBOUND 계약 모델

글. 김성훈(법무법인 미션 대표변호사)

우리 창업생태계에는 현재의 재난을 극복하고 혁신의 씨앗들을 지켜 미래를 도모할 수 있도록 하는 방주(ARK)가 필요하다. 이에 필자는 지난 칼럼에서 창업기업의 실패가 곧 창업생태계 자체의 실패와 기업가 정신의 위축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하는 정책적 제도적 대안으로서 ARK 프로젝트의 필요성 및 그 개요를 이야기했다.

ARK 프로젝트는 창업기업의 실패 상황에서도 그로 인한 사회적, 경제적 비용을 최소화하고, 혁신의 씨앗인 창업가들이 실패를 딛고 도전과 실패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필자는 지난 칼럼에서 ARK 프로젝트의 구체적인 실천 요소로 투자계약 사후관리 가이드라인의 정립 필요성 및 창업자가 재기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적 제도적 방안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나아가 창업기업의 실패와 창업가의 재도전 과정에서 창업가와 이해관계자들의 이익을 조화롭게 구성할 수 있는 법률적 대안의 마련 및 그 대안 모델의 확산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밝혔다.

이번 칼럼에서는 이중 창업기업 실패 이후 창업자의 재도전 과정에서 기존 창업기업의 투자자 등 이해관계자들이 재도전 창업에 참여하는 형태의 합의 모델, 일명 신뢰 기반 재투자 모델(REBOUND, Reinvesment in Enterprises Based on Underlying Deep trust in the founders)의 배경과 쟁점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그만두는 이유,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

2023년은 ‘스타트업’이라는 용어가 쓰인 이래 스타트업 창업자들과 종사자, 이해관계자 모두에게 가장 가혹한 한 해였다. 상당히 성공한 기업으로 인정받았던 스타트업들조차 대규모 구조조정이나 사업중단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꿈과 그 꿈만큼이나 중요한 삶을 잃어버리는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이러한 고난의 시간은 지금 이 시간에도 멈춤 없이 진행 중이다.

대부분의 스타트업 창업가들은 더 이상 사업을 지속할 수 없는 경제적인 상황에 이르러서야 사업을 그만둔다. 물론 이 ‘경제적 상황’에 대한 인식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본인 및 가족의 자산과 신용까지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소진할 때까지 자금을 융통하다가 결국 더 이상 자금 융통을 할 수 없어서 사업을 그만두는 경우도 있고, 더는 기존 사업을 유지하는 것이 의미 없고 본인과 주변에 더 큰 손실을 야기할 것으로 예상되거나 창업자 본인의 사업수행 지속 의지를 상실하여 아직 ‘이론적’으로는 사업 수행을 좀 더 계속할 여지가 있음에도 중단하는 경우도 있다. 경험상 대한민국 창업생태계에서는 전자가 후자보다 더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대부분의 경우 창업가들은 더 이상 물리적으로 사업 운영이 불가능할 때까지 ‘끝까지’ 사업을 그만두지 못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대부분의 창업가들은 ‘끝’에 이를 때까지 본인과 주변의 자산과 동원 가능한 신용의 최대치를 소진하게 되며 더 이상 동원 가능한 자력이 사라질 때가 되어서야 멈추는 것이 아니라 멈추어진다. 그래서 통상 스타트업 기업의 실패는 자연스럽게 창업자 본인과 가족의 실패로 귀결되며 창업자는 스스로는 회복 불가능한 손실을, 사회적으로는 기업 실패로 야기될 수 있는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며 실패한다.

이렇게 ‘끝까지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려움과 위기에 도전하는 창업자 특유의 끈기와 도전 정신 때문일까. 그런 내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기존 창업기업의 각 이해관계자와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책임의 정도가 높은 것이 ‘끝까지 가는’ 이유가 된다고 볼 수 있다. 근로자와의 관계에서 그리고 투자자와 채권자와의 관계에서 창업자는 사업주로서, 이해관계인으로서, 연대보증인으로서 책임을 다해야만 한다. 그들의 동의 없이 창업자의 의사에 따라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끝까지 가야만 한다. 전부라고 볼 수 없지만 상당수 이해관계자들도 창업자에게 그러한 책임의 이행을 직간접적으로 요구한다. 이와 함께 사업의 정리 과정에서 스타트업 M&A 시장의 미성숙으로 인하여 매각방식의 회수(EXIT)를 선택하기 어려운 상황도 ‘끝까지 가는’ 이유가 된다.

불가능에 도전하고 끝까지 책임을 다하는 것은 일견 낭만적인 창업 서사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 창업자 본인과 주변 이해관계자들의 손해가 급격히 증가하여 창업자 본인은 물론 주변까지 재기불능이 되는 사태가 야기되고, 창업 실패로 인한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문제가 계속되며, 사회적으로도 반복된다면 이제 이것은 더 이상 낭만적인 서사가 아닌 개인적 비극이자 사회적 참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끝까지 가기 전에 적절한 시점에 그만둘 수 있어야 한다.

다만 이처럼 사업중단이 불가피하지 않은 경우에도 창업자가 사업을 중단할 경우, 투자자 입장에서는 그 선택이 신뢰에 대한 배신, 무책임한 포기나 도피로 여겨질 수 있고, 이 과정에서 창업자가 투자자의 동의를 얻지 못한 경우 투자계약 위반에 따른 책임을 부담하게 될 수도 있다. 무모한 선택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투자자 등 이해관계자에게 책임을 다하도록 하는 길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그러나 경영 상황의 개선을 기대할 수 없음에도 끝까지 가야만 하는 것은 무모하고 불필요하며 창업자 본인과 주변에 더 큰 손해를 야기한다. 하지만 아직 해볼 수 있음에도 그만두는 것은 창업자가 제시한 비전과 미래를 신뢰하여 막대한 자금을 투자한 투자자와 여러 이해관계자에 대한 무책임한 행동이 될 수 있다. 무모한 선택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투자자 등 이해관계자에게 책임을 다하도록 하는 길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다시 시작하는 이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신뢰 - REBOUND 계약 모델

출처 : Shutterstock

유명한 기업가 A씨는 여러 인터뷰에서 과거 건설사업에 실패하여 막대한 빚을 지고 삶까지 포기하고자 하였지만, 채권자들 전원에게 ‘기회’를 준다면 다시 한 번 재기하여 빚을 꼭 갚겠다고 약속하며 그들을 설득하였고, 그래도 성공 가능성이 있는 쌈밥집을 기반으로 하여 다시 한 번 재기하여 모든 빚을 다 갚은 일화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A씨 이외에도 성공한 기업가들 중 상당수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성공한 사례가 오히려 드물고, 그 과정에는 실패가 무모함과 무책임 중 어느 하나로 귀결되지 않은 많은 이들의 도움과 신뢰가 존재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신뢰에 기반하여, 그리고 다시 한 번 받은 신뢰에 보답하기 위하여 그들은 다시 시작했고 결국 그 신뢰에 보답했다.

실제로 많지는 않지만, 국내외에서는 창업기업이 실패한 경우, 창업기업의 기존 투자자 및 채권자들이 창업자에게 창업자의 기존 채무 혹은 투자계약에 따른 권리 행사를 유예하는 대신 창업자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면서 창업자의 재창업 기업에 관하여 기존의 투자금 혹은 채권에 상응하는 지분 등 권리를 확보하는 형태의 합의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물론 창업기업의 이해관계자들의 창업자에 대한 상당한 신뢰와 인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고, 창업자 입장에서도 재도전 과정과 결과에 대한 일정한 부담을 지우는 부분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창업자의 재도전을 촉진하고 그 과정에서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방안에 있어서 이는 가장 바람직한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지난 칼럼에서 이러한 계약 모델을 신뢰 기반 재투자 모델(REBOUND, Reinvestment in Enterprises Based on Underlying Deep trust in the founders)로 명명했다.

REBOUND 계약 모델은 스타트업 혹한기 무모함과 무책임 중에서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는 창업자들에게 무모한 길을 중단하면서도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종국적으로 창업자 개인과 창업기업 이해관계자들을 보호하고 새로운 창업의 길을 여는 기업가 정신의 발로가 될 수도 있다. 다만 추상적 개념만으로는 해당 모델이 유력한 길로 널리 활용되기 어렵다. REBOUND 계약 모델이 좋은 대안으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REBOUND 계약 모델의 개요 및 내용이 구체화되고, 이에 대한 사회적 담론이 확산되어 해당 모델에 대한 이해 및 신뢰도가 높아질 필요가 있다.

REBOUND 계약 모델의 개요

REBOUND 계약 모델은 신뢰에 기반한 재투자 모델이다. 따라서 본 계약 모델을 구성함에 있어서는 ① 기존 경영 과정에서의 기초적인 신뢰가 상실되지 않았어야 하고(신뢰성), ② 창업자가 투자자들을 설득할 수 있을 만큼 성공 가능성 있는 신규 사업모델이 존재해야 하며(사업성), ③ 신규 사업의 성공에 따른 경제적 이익을 기존 창업기업 이해관계자들이 공유 받을 수 있어야 하고(이익 공유성), ④ 위와 같은 합의를 전제로 기존 창업기업 이해관계자들이 자신의 권리 실현을 위한 법적 조치 등을 종국적으로 혹은 잠정적으로 유예하여야 한다(권리행사의 유예).

먼저 REBOUND 계약 모델의 핵심 가치는 바로 ‘신뢰’다. 기존 창업기업 경영에 있어서 배임, 횡령, 선관의무 위반 등 성실, 윤리 경영을 의심할 만한 정황이 발견되었거나 중대한 계약상 의무 위반이 있었던 경우에는 당연히 REBOUND 계약 모델을 적용할 수 없다.

다음으로 REBOUND 계약 모델은 단순한 책임의 면제나 유예가 아닌 신뢰에 대한 합리적인 보답의 가능성과 기업가 정신의 존속 및 발현을 통한 창업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REBOUND 계약 모델을 적용받고자 하는 창업가는 투자자 등 이해관계자에게 그들을 설득할 수 있을 만큼 성공 가능성 있는 신규 사업모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REBOUND 계약 모델에서는 이에 동의한 투자자들이 신규 사업의 성과를 공유받을 수 있도록 하는 구체적인 법적 구조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가령 기존 창업기업의 투자자가 기존 보유 주식을 현물출자하여 창업자가 새로 창업하는 기업의 신주를 취득하거나 창업자가 투자자에게 신규 창업기업의 주식으로 기존 창업기업의 주식을 교환하도록 하는 방법 등이 구체적인 계약 조항으로 반영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창업자의 재도약이 가능하도록 기존 창업기업과의 계약에 따른 창업자의 책임에 대한 면제 또는 유예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투자계약에는 투자자 동의 없이 창업자가 신규 기업을 창업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고, 창업기업이 동의 없이 사업을 중단하는 경우에도 그에 대하여 주식매수청구권 등 제재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아울러 민간은 물론 정책금융의 대출의 경우에도 사업의 중단 및 다른 사업의 착수를 기본적으로 금지하고 그와 같은 일이 발생할 경우 강력한 제재수단을 취하도록 하는 규정들이 존재한다. 물론 투자자 등이 창업자와 합의하고 동의할 경우 위와 같은 제재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실무적으로 정책투자 또는 금융기관은 물론이고 이들이 LP로 참여하는 펀드를 운용하는 VC들에게는 위와 같은 동의와 합의의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임의로 REBOUND 계약 모델을 적용하여 각종 제재 수단을 유예하거나 면제해주기 어렵다. 따라서 해당 모델에 대한 이해와 연구 그리고 정책적 사용이 반드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REBOUND 계약 모델의 한계와 정책적 과제

이처럼 REBOUND 계약 모델은 스타트업 혹한기 창업자들을 무모함과 무책임 중 어느 하나로 몰아가는 대신 새로운 창업과 도전의 기회를 만들고, 이를 통하여 창업생태계와 창업자, 이해관계자들의 공통의 이익을 마련할 수 있는 모델이라는 점에서 우리 창업생태계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REBOUND 계약 모델 역시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을 뿐 스타트업 혹한기 모든 실패에 대한 대안이 될 수는 없다. REBOUND 계약 모델은 기본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과거를 이야기할 수 있고(신뢰성), 기대할 수 있는 미래가 있는(사업성) 창업자만이 선택할 수 있고, 선택될 수 있는 모델일 것이다. 그래도 이러한 가능성이 있는 존귀한 창업자가 있다면 우리로서는 그들을 지난 실패로 주저앉히고, 그 대가로서 그들의 미래를 가로막는 길 대신 그들이 과거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줘야 할 것이다.

REBOUND 계약 모델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우선 정책투자기관이나 정책금융 당국이 우선 REBOUND 계약 모델에 대한 이해도를 가지고, 피투자 기업의 사업중단이나 실패의 경우 무조건적인 제재수단 적용이나 사후관리 포기 대신 REBOUND 계약 모델의 적용 가능 여부를 확인하고 그것이 가능할 경우 해당 대안을 실행할 수 있도록 하는 절차와 기준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법과 제도적인 측면에서는 REBOUND 계약 모델에 동참하여 창업가와 창업생태계에 새로운 기회를 준 투자자 등 기존 이해관계자들에게 조세 등의 면에서 기존 주식 처분 이후 조세 특례의 추가 적용 문제 등 불이익이 발생하지 않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고, 나아가 정책적‧제도적으로 이러한 선택을 장려할 수 있는 인센티브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 나아가 문명의 성장은 신뢰의 크기를 키우고, 폭을 넓히는 방향과 함께 이루어져 왔다. 우리는 과거를 기억할 수 있고 미래를 기대할 수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오늘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우리가 서로 신뢰할 수 있는 크기가 곧 우리의 크기고 우리가 만들어 가고자 하는 미래만큼 상호 신뢰의 구조를 안정적으로 만들고 확산시켜야만 그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그것이 곧 우리 국가의 일이고, 또 법률가들의 일이다. 우리가 신뢰하는 만큼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

※ 본문의 견해와 주장은 필자 개인의 것이며, 한국벤처투자의 공식적인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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