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벤처캐피탈의 영역 파괴는 전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유니콘 기업의 비상장 유지 기간이 길어지며 초기기업에 집중하던 벤처캐피탈이 자사 포트폴리오의 팔로우온 투자를 위해 조성하던 ‘그로쓰펀드’ 정도가 유행이었다면, 이제는 회사별로 투자 단계를 정의내리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수많은 벤처캐피탈들이 ‘멀티스테이지’를 기본 전략으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1위 벤처캐피탈이라는 브랜드를 보유한 세콰이어캐피탈도 예외는 아닙니다. ‘Idea to IPO’를 모토로 내세우는 세콰이어캐피탈은 2세대 리더십에 해당하는 마이클 모리츠와 더그 리오네가 회사의 방향키를 잡은 1997년 이후 ‘글로벌 멀티스테이지’라는 기치를 내걸고 실리콘밸리를 넘어 중국, 인도, 동남아, 유럽 및 아프리카에 이르는 지역 확장 전략과 더불어 지역별 시드 및 초기기업 투자 펀드, 그리고 지역에 관계 없이 자사 포트폴리오 기업 중 고성장 기업에 팔로온 투자를 집행하는 ‘글로벌 성장’ 펀드를 운용하고 있습니다.
세콰이어캐피탈 프랜차이즈의 영역 파괴 시도 중 최근 주목받는 사례는 바로 액셀러레이터 확장 전략입니다. 세콰이어캐피탈의 인도 및 동남아 지역 투자를 담당하는 프랜차이즈인 ‘세콰이어캐피탈인디아1)’는 2019년 1월 SURGE라는 액셀러레이터를 시작하였습니다. 1년에 1회 또는 2회 배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SURGE 프로그램은 현재까지 총 8번째 배치 기업을 배출한 해당 지역 대표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최근 국내에서도 대형 벤처캐피탈을 중심으로 액셀러레이터를 사내 또는 별도 계열사로 설립하는 사례가 증가하며 서로 다른 두 사업 모델 간 시너지 전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세콰이어캐피탈인디아의 액셀러레이터 운영 사례는 자칫 이해 관계 상충 및 내부 경쟁과 같은 이슈가 발생하기 쉬운 두 이질적인 사업이 어떻게 조화를 이뤄 시너지를 낼 수 있는지에 대한 다양한 시사점을 제시하는 사례입니다.
2006년 현지 벤처캐피탈인 ‘웨스트브릿지 캐피탈(WestBridge Capital)’을 인수하는 형태로 인도 시장에 진출한 세콰이어캐피탈은 인도의 플립카트, 인도네시아의 토코피디아와 같은 1세대 스타트업이 등장하기 시작한 2009년부터 본격적으로 인도와 동남아 지역을 대상으로 초기 기업 투자를 시작합니다. 지금은 모두 유니콘이 되거나 상장사가 된 조마토(인도, 음식배달), 고젝(인도네시아, 차량공유), 토코피디아(인도네시아, 전자상거래), 파인랩스(인도, 핀테크), 바이주스(인도, 에듀테크), 프레쉬워크(인도, SaaS)는 모두 세콰이어캐피탈인디아가 시리즈A 단계부터 투자자로 참여한 기업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2019년 독자적인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인 SURGE를 출범시키게 된 배경 또한 지난 10년 간 축적된 초기기업 투자 경험, 현지 유니콘 기업 출신들이 활발하게 재창업에 나서는 ‘마피아’ 형성이 시작된 시점에서 유망한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 기회를 입도선매하기 위한 전략적 의사결정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세콰이어캐피탈인디아는 2009년부터 2018년까지 10년 동안 총 91건의 초기기업 투자를 진행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정의한 초기기업 투자란 프리머니(Pre-Money) 기준 기업가치 $20 million 이하에서 투자가 집행된 사례를 의미합니다.
해당 91건의 투자 사례를 분석해보면 1) 64%에 해당하는 기업은 기업가치 $10 million 이하 극초기 단계에서 첫 투자를 집행하였고, 2) 66%에 해당하는 기업은 투자 당시 직원이 10명 미만이었으며, 3)18%의 기업은 제품 출시 이전에 투자를 유치한 바 있습니다. 이를 통해 세콰이어캐피탈인디아는 독립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 출범 이전부터 시드 및 프리시드 단계에 해당하는 극초기 단계 투자를 활발히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세콰이어캐피탈은 이런 초기기업 투자 사례가 10년간 어떻게 발전해나가는지에 대한 충분한 데이터를 축적한 상태에서 액셀러레이터 설립에 나서게 됩니다. 2019년 수행한 세콰이어 자체 분석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6년까지 수행한 초기기업 투자 73건의 팔로우온 라운드를 분석한 결과 1) 11%에 해당하는 8개 기업은 세콰이어 투자 이후 $100 million 이상의 자금을 유치하였으며, 2) 21%에 해당하는 15개 기업은 $50 million 이상, 3) 41%에 해당하는 30개 기업은 $25 million 이상을 조달한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자사 시드투자 기업 중 무려 73%에 해당하는 기업이 대규모 추가 투자 유치에 성공한 것입니다.
CB Insights에 따르면 2008-2010년 시드 투자를 유치한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1,100곳의 다음 라운드 투자 유치 성공률은 48%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세콰이어캐피탈 인디아는 실리콘밸리에 비교해서도 월등히 뛰어난 기업 선정 능력을 검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10년간의 데이터 분석을 통해 유니콘 기업의 ‘초기’에 ‘많은’ 지분을 확보하여 꾸준히 팔로우온 투자를 집행하는 것이 수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이라는 점을 깨달은 세콰이어 입장에서는 초기기업 투자를 보다 체계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은 자연스러운 사업 확장의 결과인 것입니다.
만약 유능한 창업자가 배출되는 수 대비 초기 스타트업 투자 펀드의 규모가 적다면 적절한 초기기업 투자 전략과 자금력을 갖춘 펀드는 투자자 우위의 관점에서 매력적인 투자 기회를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 잠재력있는 스타트업의 규모 대비 시중의 벤처 투자 자금이 너무 많다면 기업가치에 거품이 생기고 창업자 우위의 펀드레이징 환경이 조성될 것입니다. 세콰이어캐피탈인디아는 액셀러레이터 출범 시점인 2019년 동남아 및 인도의 스타트업 투자 환경이 ‘전자’에 가깝다는 판단에 기반해 액셀러레이터 진출에 나서게 됩니다.
2019년은 인도와 동남아시아 유니콘 기업들의 성장성이 정점에 달했던 시점이었습니다. 동남아시아 차량공유의 맹주 그랩과 고젝이 각각 15조 원과 10조 원의 기업가치를 기록하였으며, 인도에서는 OYO, 바이주스, 조마토와 같은 인터넷 기업들의 기업가치가 6개월 단위로 상향 조정되던 시기였습니다. 보통 기업이 유니콘 단계에 오르게 되면 초기 성장 과정을 함께한 직원들이 퇴사 후 재창업에 나서는 사례가 늘어난다는 점에 비춰보면, 2019년은 해당 지역이 초기스타트업 투자의 르네상스 시기로 막 진입하던 시점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2019년 당시 인도와 동남아의 창업 생태계를 살펴보면 실력있는 인력들이 안정적인 직업 대신 창업을 선택하는 비중이 늘어나는 확장기에 접어드는 시점이었지만 벤처 투자 환경은 여전히 검증된 기업에 투자를 희망하는 시리즈 A 이후 단계 펀드들이 주류였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세콰이어캐피탈인디아의 조사에 따르면
요약하자면, 2019년만 해도 인도-동남아 지역의 창업자로서 시리즈 A 이전 단계의 펀드레이징을 진행한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세콰이어캐피탈인디아는 이런 투자 생태계의 ‘수요-공급’ 불균형을 기회로 파악하고 전 세계 세콰이어 프랜차이즈 중 최초로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을 인도-동남아 지역에서 시작하게 됩니다. 프로그램의 모토 또한 ‘빠른 스케일업’을 내세워 시드 단계 스타트업이 펀드레이징 걱정 없이 사업 및 제품 개발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핵심 가치로 제시해 해당 지역 창업자들의 열렬한 환경을 받게 됩니다.
SURGE는 총 16주로 구성된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입니다. 1년에 2회 배치를 선발하며, 한 배치당 최대 20개 기업을 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구체적인 프로그램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프로그램의 마지막 주에는 UpSurge라는 행사를 통해 인도-동남아 지역의 유명 벤처캐피탈들을 초청해 스타트업과 네트워킹을 하며 투자 논의를 시작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합니다. 스피드데이팅 형식의 매칭은 지양하고, 각 기업들이 심도깊은 논의를 통해 텀싯 단계까지 진행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드는 것 또한 프로그램의 특징입니다.
세콰이어라는 브랜드와 더불어 프로그램의 가장 큰 장점은 전 세계 어떤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투자 규모입니다. 액셀러레이터에 참여하게 되면 시드 단계에서 최대 40억 원($3 million)에 가까운 자금을 디폴트로 조달할 수 있다는 것은 초기 스타트업에게 커다란 장점으로 다가옵니다. 와이콤비네이터의 기업당 투자 규모가 $0.5 million인 점을 감안하면 이보다 6배나 많은 투자금액을 책정한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프로그램의 취지 자체가 인도-동남아 스타트업의 초기 자금 조달의 고민을 해결해준다는 것이기 때문에 세콰이어다운 자금력으로 극초기 단계부터 유망 스타트업의 투자 기회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2019년부터 시작된 SURGE 프로그램은 현재까지 총 8번의 배치 기업을 배출하였습니다. 배치당 기업 수는 15곳 내외에서 큰 변화없이 유지되어 왔으나 최근에는 기업 수가 조금씩 줄어드는 추세도 관측됩니다.
각 배치 기업들의 현재 펀딩 단계를 살펴보면, 총 130개 기업 중 시리즈 C 이상 단계까지 펀딩을 진행한 기업이 전체의 3.1%에 해당하는 4곳, 시리즈 B까지 펀딩을 진행한 기업은 전체의 14.6%에 해당하는 19곳, 시리즈 A 펀딩까지 진행한 기업은 25.4%인 33곳으로 집계됩니다. 4년의 기간 동안 43%에 해당하는 기업이 시리즈 A 단계까지 펀딩을 진행했다는 측면에서 평균 이상의 생존률을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팬데믹 초기인 2020년 프로그램에 참여한 SURGE 03 & 04 배치 기업의 시리즈 A 진행 비중이 높은 점이 특징입니다. 당시의 벤처투자 시장의 활황에 힘입어 초기기업들의 자금 조달 환경이 우호적이었다는 점이 영향으로 작용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또한 첫 배치 기업의 경우 절반에 이르는 기업이 시리즈 B 이상 펀딩에 성공했다는 점도 고무적입니다. 특히 인도의 소상공인 장부앱 Khatabook, 인도의 에듀테크 + SaaS 기업 Classplus, 인도네이사의 인슈어테크 기업 Qoala, 방글라데시의 소셜커머스 기업 ShopUp은 프로그램 이후에도 대규모 투자 유치에 성공하며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기업들입니다.
올해 진행된 8번째 배치 기업을 살펴보면 AI에서 마켓플레이스, 탄소 크레딧까지 다양한 분야의 스타트업들이 선정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해당 기업들은 2023년 3월 프로그램을 졸업하며 적게는 $1.5 million에서 많게는 $4.6 million에 이르는 규모의 시드 라운드를 마무리하였습니다.
기업 명 | 창업 시점 | 공동투자자 | 사업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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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tworld | 2022년 9월 | • Redbrook Pte Ltd • SuperMorpheus Fund | GenZ 게이머가 쉽게 사용자 정의 3D 세계를 만들고, 이러한 세계를 연결하여 몰입형 소셜 게임 경험을 제공하는 메타버스 게이밍 플랫폼 |
Arintra | 2021년 9월 | • GTM Fund | 인공지능 기반의 자율 의료 코딩 플랫폼으로, 미국 병원들의 보험 청구 자동화를 통해 더 나은 지급과 신속한 지급을 지원 |
Bifrost | 2020년 3월 | • Wavemaker | 가상 세계와 합성 데이터셋을 구축하여 게임, 메타버스, 이동성, 로봇, 우주 및 국방 등의 분야의 AI 모델 훈련 서비스 |
Calyx Global | 2022년 6월 | • Goose Capital • New Climate Ventures, Susquehanna • Time Zero Capital | 독립적인 탄소 크레딧 평가를 통해 기업들이 더 나은 탄소 크레딧을 선택할 수 있도록 지원 |
Diri Care | 2022년 3월 | • East Ventures | 인도네시아에서 피부 관리와 같은 다양한 건강과 미용 분야에 대한 온디맨드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술 플랫폼 |
MasterChow | 2020년 6월 | • Grand Anicut Fund (GAF) • WEH Ventures | 인도 대중을 위한 홈쿡 레시피 및 식자재를 공급하는 푸드테크 기업 |
Meragi | 2021년 4월 | • Venture Highway | 현대적인 결혼식을 원하는 인도의 젊은 세대를 겨냥한 웨딩 서비스 온라인 플랫폼 |
Metastable Materials | 2021년 10월 | • Speciale Invest • Theia Ventures |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리튬이온 배터리를 재활용하는 첨단 기술 연구기업 |
RedBrick AI | 2022년 1월 | • Y Combinator | AI는 회사들이 의료 영상 인공지능을 구축하는 데 도움을 주는 버티컬 SaaS 플랫폼 |
Requestly | 2021년 12월 | • 100x Entrepreneur • Y Combinator • Titan Capital | 개발자와 품질 보증 엔지니어들이 웹 애플리케이션을 실시간으로 테스트하고 디버그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SaaS 플랫폼 |
Tentang Anak | 2022년 2월 | • Goodwater Capital, Insignia Venture Partners, Paragon • Venturra | 인도네시아에서 빠르게 성장 중인 육아 관련 마켓플레이스이며, 종합적인 아동 발달 솔루션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함 |
Vaaree | 2022년 5월 | • All In Capital • Better Capital • Peer Capital | 인도에서 고품질 가정용 제품을 위한 선별된 온라인 마켓플레이스로, 모든 인도 사람들이 저렴한 가격에 아름다운 집을 만들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미션을 목표로 함 |
SURGE 프로그램의 성공 요인을 요약해보면 1) 세콰이어캐피탈의 투자팀과는 별도로 움직이는 독립적인 SURGE팀을 꾸리며 리소스를 할당한 점 2) 기업당 $3 million이라는 파격적인 투자 금액을 내세워 유망한 스타트업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끌어들인 점 3) 세콰이어의 네트워크와 브랜드, 멘토링 및 본 펀드의 팔로우온 전략을 통해 프로그램 참여 기업의 성장을 전폭적으로 지원한 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또한 프로그램 종료 시점에 시드 라운드를 진행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액셀러레이터의 투자와 더불어 해당 지역의 선도 벤처캐피탈의 공동 투자를 유치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디자인한 점은 ‘창업자가 시리즈 A까지 자금 조달에 대한 걱정 없이 제품 및 서비스 개발에 집중할 수 있게 하겠다’는 애초의 취지에 부합하는 전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최근 많은 벤처캐피탈이 투자 기회 확보를 선점하고 유망한 기업을 초기 단계부터 발굴하기 위해 액셀러레이터 사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고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세콰이어캐피탈인디아는 무려 10년간의 초기기업 투자 경험을 축적한 후 시장 확장 기회를 포착한 시점에 전략적으로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을 시작했다는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국내에서도 벤처캐피탈과 액셀러레이터의 다양한 합종연횡과 전략적 협업이 예상된다는 점에서 세콰이어캐피탈인디아의 SURGE 프로그램은 성공적인 액셀러레이터 론칭과 운영을 위한 다양한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